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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1. 21世 〉11. <부정공>월파공휘기창묘표(月坡公諱諱淇昌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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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부정공>운호공휘태중묘표(雲湖公諱泰中墓表)
雲湖公諱泰中墓表 王鯉孟筍世之言孝者一辭並稱而朱夫子之編小學也不載雪筍之事何也盖孝之所感雖不可謂無是理亦不可以此爲常而敎以導民也故故略之盖吾夫子不語恠神之遺意也然則我族兄雲湖處士積誠默禱之餘夢得神人指示遂率炮手數人負父入方踏島日得鹿一二奉以調養至于十餘日使積年盲廢之眼忽然復明而前之師曠便成後之離婁此不可以載於小學書乎噫用藥調病是常理也老人見夢亦可謂誠孝通於神明也十日十鹿興雙鯉出氷群雀八募吾未知孰爲優劣而不幸不出於朱子之時未得一筆揄揚也况自十許歲時事繼母無異所生人不可間言者乎其在髫齡己不喜雜戱惟以文墨爲己識稍長淹貫經史場屋之間聲譽蔚然然自壬午以後專抛擧業寓情物表亥過水石淸奇處盡日吟弄而歸公之爲公此可以槩之矣若有以一節之孝論公則淺乎其爲知也公以 純廟癸巳生以光武皇帝戊戌二月二十六日卒葬于黃田面新月村後長者洞負辛原夫人張氏與君子同庚而以丁巳三月二十三日卒迫於世變渴葬祔公墓右公諱泰中字極五姓趙氏以玉川府院君諱元吉前朝忠臣副正諱瑜爲顯祖副正孫諱智崙官察訪相好有亭兄弟四人遂以友愛名於世是生諱穩生進俱中官直長後有諱暻時述號月川諱維元號仙川出入於尤庵宋先生之門爲士友所推重是於公爲七世祖也曾祖諱一國祖諱在憲考諱疇錫亦皆以文學孝友見稱妣陽川許氏通德郞邁女繼妣南原尹氏馨鉉女夫人籍興德燂女育一男四女男鐸模娶濟州梁相鶴女再娶南原梁馨洙女女長適順興安榮鎭次星州李敎興木川張基泰尙州朴海燮孫東熺木川張氏鐸模抱持行狀而來告曰先人有至行于世而沒後二十餘年尙闕隧道之文此不肖所痛恨者也願得公一言以爲表也噫不侫文甚下安敢爲人金石字然竊有槩於心者宗黨有此賢長老而自顧爲人無似未得一拜床下忽焉隔千古豈非可恨哉故不辭而略叙之如此使過者知仁人孝子之藏而且自陳其平日音旨之相違以謝公之靈於九原也己 族弟 章燮 謹撰 운호공휘태중묘표(雲湖公諱泰中墓表) 왕 상(王祥)의 얼음속의 잉어와 맹 종(孟宗)의 눈 가운데 죽순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말들을 하지만 주 부자(朱夫子)가 엮은 「소학(小學)」에 이 사실을 실어 놓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대부분 효도로 천지를 감동시키는 경우가 전혀 이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떳떳한 것처럼 여겨 이것으로 백성을 가르키고 인도할 수 가 없기 때문에 생략한 것이니, 이는 공자가 괴이하고 신기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는 뜻을 이어받은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 족형(族兄) 운호처사(雲湖處士)가 오랫동안 기도한 끝에 신인(神人)의 지시를 얻어 포수(炮手) 몇 사람과 함께 자기 아버지를 모시고 방답도(方踏島)에 들어가 十여일 동안 하루에 한두 마리의 사슴을 잡아 봉양하니 오랫동안 실명하여 보이지 않던 부친의 눈이 갑자기 밝아져 그 전날의 사광(師曠)의 눈과 같이 어둡던 눈이 문득 이루(離婁)의 눈과 같은 밝은 눈이 되게 하였는데, 이 일도 역시 「소학(小學)」에 쓸수 없는 일이라 하겠는가? 아! 약을 써서 병을 낳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요, 노인이 꿈에 보인 것은 역시 그 사람의 효성이 신명(神明)에 통한 것이라 하겠다. 十여일 동안 十여마리의 사슴을 얻은 것이 잉어가 얼음 밖으로 뛰어오르고 새들이 막안으로 날아들었다는 일과 어느 것이 우열(優劣)이 될지 모르겠으나 불행하게도 주자(朱子) 당시에 태어나지 못하여 그의 찬양을 받지 못한게 한이다. 더우기 十여세 때부터 계모(繼母)를 자기 생모(生母)와 같이 섬겨 남들이 그에 대한 사잇말은 할 수 없을 정도였음에랴! 공은 어려서부터 잡희(雜戱)를 좋아하지 않고 문묵(文墨)을 자기 직업처럼 여기더니 점점 성장해감에 따라 경사(經史)에 관통(貫通)하여 과거장에 그의 명성이 드놓았다. 그러나 임오년(壬午年) 뒤부터는 과거에 뜻을 버리고 사물밖에 뜻을 두어 수석이 맑고 기이하게 생긴 곳을 만나면 하루종일 읊조리며 노닌다가 돌아오곤 했다. 공은 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인 것이다. 만일 한마디 효도로 공을 논한다면 이는 공에 대해 너무 모르는 처사라 하겠다. 공은 순조(純祖) 계사년(癸巳年)에 태어나 광무황제(光武皇帝) 무술년(戊戌年) 二월 二十六일 세상을 떠났는데 묘는 황전면(黃田面) 신월촌(新月村) 뒤 장자동(長者洞) 신원(辛原)이며, 부인 장씨(張氏)는 공과 같은 나이로 정사년(丁巳年) 三월 二十三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세변(世變) 때문에 갈장(渴葬)으로 공의 묘 오른쪽에 부장하였다. 공의 휘는 태중(泰中)이며, 자는 극오(極五)이고 성은 조씨(趙氏)이다.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원길(元吉)과 고려(高麗)의 충신(忠臣) 부정(副正) 유(瑜)는 공의 현조(顯祖)이시다. 부정(副正)의 손자 지륜(智崙)은 벼슬이 찰방(察訪)인데 상호정(相好亭)을 지어 놓고 형제 넷이 모여 우애하므로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아들 온(穩)은 생원(生員)과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며 벼슬은 직장(直長)이었다. 그뒤 휘(諱) 경(暻), 휘(諱) 시술(時述)의 호는 월천(月川)이며 유원(維元)이 호는 선천(仙川)인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사우의 추중(推重)하는 바가 되었는데 공의 七세조 이시다. 증조는 일국(一國)이고 조는 재헌(在憲)이며 고는 주석(疇錫)인데 문학(文學)과 효우(孝友)로 칭송을 받았다. 비(妣)는 양천 허씨(陽川許氏) 통덕랑(通德郎) 매(邁)의 딸이며 계비(繼妣)는 남원윤씨(南原尹氏) 형현(馨鉉)의 딸이었고 부인은 흥덕장씨(興德張氏) 담(燂)의 딸로 一남 四녀를 두었다. 남은 탁모(鐸模)인데 제주(濟州) 양상학(梁相鶴)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남원(南原) 양형수(梁馨洙)의 딸에게 재취하였다. 딸은 순흥(順興) 안영진(安榮鎭) 성주(星州) 이교흥(李敎興) 목천(木川) 장기태(張基泰) 상주(尙州) 박해섭(朴海燮)에게 출가하였고 손자 동희(東熺)는 목천장씨(木川張氏)에게 장가들었다. 탁모(鐸模)가 행장을 들고와 말하기를, 『선인(先人)이 지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二十여년이 넘도록 아직도 묘문을 새기지 못한 것이 불초의 한(恨)으로 생각하는 바이니, 원컨데 공은 한말로써 표해달라.』 라고 하였다. 아! 나 같은 졸열한 문장으로 어찌 남을 위하여 금석문자(金石文字)를 쓰겠는가. 하지만 내 마음에 닿는 것은 종당(宗黨)에 이와 같이 훌륭한 어른이 계신데도 내가 일찌기 찾아 뵙지도 못하고 영원히 격리되어 버렸으니 이 어찌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의 부탁을 사양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써서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인인(仁人) 효자(孝子)의 무덤인줄 알게하고 또 평일에 서로 만나보지 못한 뜻을 진술하여 구천에 계신 공의 신령에게 사례하노라. 族弟 章燮 註:왕 상(王祥) ― 서진(西晋)시대에 태보(太保)를 지낸 왕상(王祥)이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그의 계모가 생선을 먹고 싶어 하였을 때 얼음위에서 고기를 얻어다가 봉양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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